금동신발백제 5세기. 전남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중국에 비하면 1000여 년이나 늦은 편이다.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동검·동과(銅戈)·칼집에 쓰인 초금구(鞘金具)·동모(銅鉾)·검파두식(劍把頭飾)·동부(銅斧)·청동간두식(靑銅竿頭飾)·청동거형두(靑銅車衡頭)·쌍두령(雙頭鈴)·팔두령동구(八頭鈴銅具)·견갑(肩甲)·검파형 동기(劍把形銅器)·동탁(銅鐸)·동경(銅鏡)·동물형 대구(動物形帶鉤)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들과 함께 그것을 주조하는 데 사용된 돌로 만든 주범(鑄范)도 같이 나와 청동기 제조과정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동물형대구의 조각수법은 비교적 우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경 뒤의 세문(細文)은 가는 직선과 동심원을 정치(精緻)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어 그 솜씨가 볼 만하다.
철기도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에 들어왔다.
무기와 농기구 등의
출토유물이 더러 있으나, 부식이 심해 원형 그대로 남은 것은 드물다.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 아궁이는 부식이 안 된 채 비교적 완형에
가깝다. 신라와 백제 고분 출토유물 가운데는 청동제 기구들이 많다.
3개의 다리와 손잡이가 달린 초두와 정(鼎)·완(盌)·합(盒)·다리미 같은 것은 그 시대의 세련되고 정교하며
호화로운 금은기처럼 균형잡힌 형태와 기품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동종은 당시의 신라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한다.
중국의 동종과는 판이한 신라 특유의 형식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종 위에 달린 음통(音筒)은 신라종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신라 동종의 신비한 소리의 근원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종을 다는 고리인 용뉴(龍鈕)·문양대(文樣帶)·비천상(飛天像)·유곽(乳廓)·당좌(撞座)의 조각은 힘차고 정교한 아름다움이 혼연일체가 되어, 신라 금속공예의 수준을 말해준다. 석탑 안에
안치되어 있는 사리기에서도 신라 금속공예의 솜씨를 찾아볼 수 있다.
감은사서삼층석탑(感恩寺西三層石塔) 속의 사리기는 청동기공예의
걸작품으로, 높이 20cm의 작은 사리기의 정교한 짜임새와, 거기에 배치된
신장상(神將像)·주악상(奏樂像)·동자상(童子像) 등은 신라 불상조각을 응축시킨 듯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고려시대에도 여러
금속공예가 매우 활발하였다. 금입사(金入絲)·은입사(銀入絲) 등의 금은상감이 특히 활발하였고, 청동정병(靑銅淨甁)이나, 청동향로 등 이런 금은상감수법으로 된 매우 훌륭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사찰에서 사용되던 금고(金鼓)가 많이 만들어진 것도 고려시대이며 여러 모양을 한 동경이 쏟아져 나온 것도 역시 이때이다.
금동탑·금탑과 같이 청동소탑(靑銅小塔)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도 고려시대의 일이다. 이 밖에 합금기법도 발달하여 놋쇠로 각종
식기를 제작하였으며, 이것은 나중에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금속으로 만든 그릇도
당시에 유행하였던 청자기와 같은 형태나 장식을 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금속화폐를 주전(鑄錢)하기 시작한 것도 고려 때이며,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도 역시 이때였다.
이러한 금속공예의 발달로
주조기술과 단금기술이 점차 다양해져 여러 분야의 금속제품이
만들어졌다. 장도(粧刀)·비녀와 같은 장신구의 제작과 함께 조선시대에는
목가구를 보강하고 장식하는 금구가 개발되어, 생활 가구들을 아름답게 하는 데 금속공예가 공헌한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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