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랜드 정의 및 기원
티파니는 1837년 미국 뉴욕 맨해튼(New York, Manhattan)에서 찰스 루이스 티파니(Charles Lewis Tiffany)와 존 버넷 영(John B.Young)이 문구류와 팬시상품을 판매하는 매장 ‘티파니, 영 앤드 엘리스(Tiffany, Young and Ellis)’를 연 것이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이후 도자기, 실버 등 제품을 다양화하고 1853년에는 회사 이름을 티파니 앤 코(Tiffany & Co.)로 바꾼 뒤 보석을 전문적으로 제작·판매하는 미국의 명품 브랜드가 되었다. 티파니는 좋은 원석을 발굴하고 매입하는 동시에 재능있는 디자이너와 보석 전문가를 영입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분야에서 유일하게 주목받는 미국 브랜드가 되었고, 역대 미국 대통령, 영부인, 미국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1955년 월터 호빙(Walter Hoving)이 티파니 가(家)로부터 회사를 매입하여 회장이 되었고, 월터 호빙의 권유로 1956년 티파니에 입사한 디자이너 장 슐럼버제(Jean Schlumberger)는 1970년대 후반까지 티파니의 디자이너로서 티파니의 주요 작품을 만들며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티파니는 엘사 페레티(Elsa Peretti), 팔로마 피카소(Paloma Picasso) 등 세계적인 주얼리 디자이너들을 영입하여 성공적인 컬렉션들을 런칭했다. 또한, 1886년 티파니 세팅 링을 비롯해 다양한 웨딩 컬렉션을 선보이며 ‘신부들의 로망’, ‘웨딩 링의 대명사’로 인정받게 되었다.
2. 브랜드 탄생 및 설립자
티파니의 설립자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1812년 2월 15일 미국 코네티컷 킬링리(Killingly, Connecticut)에서 태어났다.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15세부터 면공장 사장이었던 아버지의 잡화점에서 일을 시작했고, 25세가 되던 1837년 9월14일에 아버지로부터 투자받은 돈 1천 달러를 가지고 뉴욕 맨해튼 259 브로드웨이(New York, Manhattan 259 Broadway)에 문구류와 선물, 팬시 용품,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골동품 등을 판매하는 작은 매장을 열었다. 학교 친구인 존 버넷 영과 동업을 했기 때문에 처음 매장의 이름은 ‘티파니, 영 앤드 엘리스’였다.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친구와 의기 투합하여 연 이 작은 매장의 첫 날의 매출액은 4.98달러였다. 하지만 2년 후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성공의 관건은 훌륭한 디자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동업자와 함께 유리, 도자기, 식기류, 시계, 은 제품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며 티파니를 성장시켰다.
브로드웨이에 문을 연 매장
3. 브랜드 역사
1) 보석 브랜드로서 새로운 시작 ~ 성장(1848~1877)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귀족의 보석이 시장에 대거 나오자 티파니는 이를 입수하면서 보석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티파니는 1850년 파리에 첫 주얼리 매장을 여는데 당시 이름은 ‘티파니, 리드 앤 코(Tiffany, Reed & Co.)’였다. 1851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뉴욕의 은 세공사인 에드워드 C.무어(Edward Chandler Moore)의 사업체를 인수하여 은 제품을 제작·판매하기 시작했다. 1853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공동 경영자로부터 경영권을 매입해 회사 이름을 ‘티파니 앤 코(Tiffany & Co.)’로 바꾸고 브로드웨이 550번지로 매장을 이전했다. 당시 유명한 주얼리 브랜드는 모두 유럽 태생이었는데 티파니는 유럽의 주얼리와는 차별화되는 모던한 디자인으로 뉴욕 상류층에게 인기를 모았다. 1860년대 미국에서는 카메오 브로치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최고의 카메오 조각장인은 로마나 파리에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1870년 12월, ‘더 뉴욕 이브닝 메일(The Newe York Evening Mail)’ 신문은 티파니의 카메오 브로치가 로마나 파리에서 생산된 것보다 훨씬 패셔너블하다고 보도할 만큼, 주얼리 브랜드로서의 티파니의 위상이 높아졌다.
1867년, 티파니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여 ‘은세공 부문 최고 메달(The Excellence In Silverware)’을 비롯해 총 8개 부문의 메달을 수상했다. 미국 회사가 은세공 부문에서 최고 메달을 수상한 것은 최초였다. 티파니는 1868년 런던에 매장을 냈는데, 이는 파리에 이어 유럽에서의 두 번째 티파니 매장이었다.
1873년 티파니의 은 제품은 이미 많은 명성을 얻었는데, 당시 티파니가 만든 은 주전자가 미국산 은 제품으로는 처음으로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었다.
2) 티파니 다이아몬드의 탄생 ~ 다이아몬드의 왕(1878~1901)
1878년 티파니는 남아프리카의 킴벌리(Kimberley) 광산에서 전년도에 발견된 287.42캐럿의 옐로 다이아몬드를 1만8천 달러에 매입했다. 이 옐로 다이아몬드는 티파니의 수석 보석학자인 조지 프레드릭 쿤츠 박사(Dr. George Frederick Kunz)가 1년간 연구한 끝에 128.54캐럿의 쿠션 브릴리언트 컷으로 탄생했다. 조지 프레드릭 쿤츠 박사는 옐로 다이아몬드 본연의 아름다움을 살리기 위해 절반 이상의 손실을 감수하고 총 82면으로 커팅하여 ‘마치 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듯’하다고 표현될 정도의 광채를 구현했다. 당시 다이아몬드를 최고로 많이 커팅한 것이 58면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82면 커팅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진보한 것이었다.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옐로 다이아몬드로 기록된 ‘티파니 다이아몬드(The Tiffany Diamond)’이다. 티파니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의 크기보다는 광채를 중요시하는 티파니의 기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티파니 다이아몬드는 1960년 디자이너 장 슐럼버제가 디자인한 리본 로제트(Ribbon Rosette) 목걸이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1961년의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포스터 촬영에서 사용되었다. 티파니 다이아몬드는 1995년 ‘바위 위에 앉은 새(Bird On A Rock)’라는 작품으로 다시 세팅되었고, 2012년에는 티파니 창립 1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20캐럿이 넘는 화이트 다이아몬드와 함께 목걸이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