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랜드 정의 및 기원
까르띠에(Cartier)는 주얼리를 비롯해 향수, 시계, 필기구, 안경, 스카프 등을 제작 · 판매하는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이다. 세공기술자인 루이 프랑스 까르띠에(Louis Francois Cartier)는 1847년 그의 스승이었던 아돌프 피카르(Adolphe Picard)의 아틀리에(Atelier, 작은 공방)를 인수했고, 자신의 성(姓)을 따 ‘메종 까르띠에(Maison Cartier)’로 변경했다.1850년대 까르띠에는 섬세한 세공을 바탕으로 화려한 주얼리 라인을 선보여 프랑스 사교계에서 인기를 얻었고, 이후 가업을 물려받은 까르띠에 가의 형제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해 브랜드 인지도를 넓혔다. 까르띠에는1964년까지 가족 경영 체제로 유지되다가 1993년 방돔 럭셔리 그룹(Vendome Luxury Group)에 합병되었고, 1997년 리치몬드 그룹(Compagnie Financière Richemont S.A.)이 방돔 럭셔리 그룹을 인수하면서 리치몬드 그룹의 자회사가 되었다.
2. 브랜드 탄생 및 설립자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1819년 프랑스 파리(Paris)에서 화약통 제조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1830년대 중반 파리 몽토르겨이(Montorgueli)가 29번지에 위치한 보석 세공자 아돌프 피카르(Adolphe Picard)의 아틀리에에서 견습생활을 시작했다. 29살이 되던 1847년에 아돌프 피카르가 죽자,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그의 스승이 운영하던 아틀리에를 인수했고, 자신의 성(姓)을 따 ‘메종 까르띠에’로 이름을 변경했다. 또한 자신의 이름 앞 글자인 L과 C로 둘러싸인 하트와 마름모꼴 문양을 자신의 홀 마크(Hall-mark)로 제작해 프랑스 상업등기소에 등록했다. 이것이 ‘까르띠에’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설립자 루이 프랑수와 까르띠에(1819~1904)
3. 까르띠에의 새로운 기술 및 발명
1) 까르띠에의 소재 혁신: 플래티넘 도입
1890년대 후반부터 루이 까르띠에는 최초로 주얼리에 플래티넘(Platinum, 백금)을 사용했다. 이전까지 주얼리의 제작에는 주로 금이나 은과 같은 금속이 쓰였다. 금과 은은 비교적 유연한 편이지만 플래티넘에 비해 밀도가 낮아 쉽게 구부러지며, 변색과 마모가 쉬워 흠집이 잘 나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 플래티넘은 무게가 가벼워 착용하기 간편했고 밀도가 높고 단단해 원석을 안전하게 지탱할 수 있다. 플래티넘은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니켈(Nickel), 이리듐(Iridium) 등과 합금해 사용되기도 한다.플래티넘은 무엇보다 전성(압력을 가하면 얇게 퍼지는 성질)과 연성(늘어나는 성질)이 강한 특징이 있어서 아주 얇은 두께로 길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약 28그램의 플래티넘은 43킬로미터 길이의 실처럼 변형이 가능하다. 까르띠에는 플래티넘의 이러한 특징을 활용해 레이스 처럼 표현한 나뭇잎, 월계관 및 왕관 등의 세밀하고 섬세한 장식이 적용된 신고전주의(Néo-Classicisme) 스타일의 주얼리를 제작했다. 까르띠에의 정교한 세팅은 당시 전 세계 왕실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현재 플래티넘은 다양한 주얼리 브랜드에 보편화 되었다.
1906년 플래티넘을 활용해 제작한 코사지 장식 1910년 플래티넘을 활용해 제작한 왕관
1928년 까르띠에가 제작한 ‘파티알라의 마하라자의 의식용 목걸이’
까르띠에의 팬더 주얼리 제작과정
쟌느 투생이 제작한 팬더 주얼리 중에는 1949년 까르띠에 주얼리의 팬이었던 윈저 공작부인(Duchess of Windsor)을 위해 제작된 표범 브로치가 가장 유명하다. 이 브로치는 카보숑 커트(Cabochon Cut, 보석을 잘라내지 않고 구형(球形)이나 타원체의 산 모양으로 연마한 것)를 한 152.35 캐럿의 사파이어에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팬더가 앉아있는 형태로 당시 언론에서 ‘주얼리의 원자폭탄(Atomic Bomb of Jewelry)’이라고 불렀다.
1949년 쟌느 투생이 윈저 공작부인을 위해 제작한 표범 브로치
보석의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인 ‘인비저블 세팅’
루이 까르띠에의 친구이자 프랑스의 유명 시인인 장 콕토 장 콕토를 위해 루이 까르띠에가 디자인한 칼
장 콕토는 루이 까르띠에에게 받은 트리니티 링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해 항상 약지에 착용했다고 한다. 이후 루이 까르띠에와 장 콕토와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루이 까르띠에는 1955년 장 콕토가 프랑스의 유명 학술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 종신회원제를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권위있는 학술단체)’의 종신회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장 콕토를 위한 칼을 제작했다. 칼은 장 콕토의 희곡과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그리스 신화의 인물 ‘오르페우스(Orpheus)’의 옆모습을 본 딴 디자인으로, 칼자루는 가는 실 느낌으로 금을 꼬아 만들었으며, 칼자루의 끝부분은 2.84캐럿 에메랄드와 두 개의 루비로 장식된 하프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트리니티 링은 장 콕토가 착용해 파리 상류사회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이후에도 다양한 버전으로 제작되었다. 2010년 까르띠에는 장 콕토가 죽기 전에 살던 집을 파리 근교로 이전하는 것을 지원했고, 장 콕토를 기념해 새로운 트리니티 드 까르띠에를 출시했다.
이때 발표된 ‘트리니티 라 벨(Trinity la Belle)’은 장 콕토가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던 두 개의 트리니티 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버전으로, 화이트 골드 링을 제외한 두 개의 링이 각각 두 갈래, 세 갈래로 세공되어 있어 착용했을 때 마치 6개의 링이 엮인 것처럼 보인다. 이 중 화이트 골드 링에는 까르띠에 로고와 다이아몬드 별이 새겨져 있다. 이 별은 장 콕토의 사인에 항상 등장하던 별을 상징한다. ‘트리니티 소바지(Trinity Sauvages)’는 화이트 골드 링에는 다이아몬드를 세팅했고, 옐로 골드 링에는 검은 색으로 표범 무늬를 표현했다. 핑크 골드 링에는 까르띠에 로고가 새겨져 있었고 팔찌와 펜던트로도 제작되었다.
세 개의 고리가 하나로 엮인 것이 ‘트리트리니티 라 벨 ‘트리니티 소바지
특징인 트리니티 링 (Trinity la belle)’ (Trinity Sauv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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